[파시즘]
무솔리니는 군대의 열렬한 충성심이 행여나 꺼질세라 재빨리 움직였다. 1929년 교황과 라테란 협정이라 불리는 콘코르다트에 서명함으로써 교황에게 독립 정부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 무솔리니의 집정 아래 이탈리아는 여전히 입헌군주국의 허울을 쓰고 있었지만, 실상은 독재국가였다. 파시스트 정권은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모든 상대를 잔인하게 살해했고, 이탈리아인 삶의 모든 면면을 통제했다. 집권 초기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스트 정권은 나라 경영의 개선, 경제 안정, 근로조건 개선, 대규모 공공사업 개시 등으로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무솔리니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여러 유사점이 있었지만, 나치와는 달리 파시스트는 순수 혈통에 대한 이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무솔리니는 자신을 로마제국의 상속자로 여기고, 다시 한번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1935~1936년, 제대로 무장한 이탈리아 군대는 독가스를 사용하고 적십자 병원을 폭파하는 등 무자비하게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를 이유로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게 무역 제재를 실시하겠다고 위협하자, 이탈리아는 1936년 나치와 함께 추축동맹을 결성했고, 1939년 4월에는 알바니아를 침략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동료 독재자들을 지원사격하고 나섰다. 스페인 내전에는 독재자 프랑코를 위해 병력을 파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동맹군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와 그리스에서 패배했고,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침공하며 벼랑 끝으로 몰렸다. 이탈리아의 민심이 악화되면서 무솔리니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1943년 그는 자신이 조직한 파시스트당 대회에서 파면되었다. 바돌리오가 이끄는 새 정부는 연합군에 항복하고, 이제 전쟁은 온전히 독일의 것임을 선언했다. 이탈리아를 빠져나가 독일 낙하산 부대에게 구출된 무솔리니는 북부 이탈리아에 독립 정부를 세웠다.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점령했고,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는 전쟁터였다. 무솔리니와 그이 정부였던 클라라 페타치는 이탈리아를 빠져나가려다 코모호에서 붙잡혀 총살당했고, 둘의 시신은 밀라노의 한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시민들이 던지는 돌을 맞는 수모를 당했다.
-전후 이탈리아
1946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의 아들 움베르토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움베르토 2세는 단 34일 만에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6월에 열린 국민투표에서 이탈리아인들이 군주제를 철폐할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그렇게 공화국이 되었다.
사보이 왕가는 그 지위를 포기하고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으며, 다시 이탈리아 땅을 밝는 것이 금지되었다. (2003년 왕가의 재입국이 허용됐다)
20세기 후반,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 공산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해 정국을 이끌었으나 3개당 모두 날이 갈수록 부패해 갔다. 연정 내 끊임없는 권력 다툼 때문에 중도에 정부가 해산되고 새로운 연립내각을 구성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발생했지만, 체제는 바뀌지 않았다. 정치인들에게 뇌물은 막대한 후원금을 얻을 수 있는 출처였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 액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경유착 뇌물 스캔들이 터졌고, 기독교민주당의 다수 의원은 하룻밤 사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이는 소련의 몰락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중대한 사건이었다.
종전 후 이탈리아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로 '총탄의 세월 Anni di piombo'를 꼽을 수 있다. '총탄의 세월'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이탈리아에서 좌우익 무장단체가 총과 폭탄을 동원해 테러와 납치를 자행했던 시절이다. 이 시기에 약 1만 5,000건의 테러 공격이 일어나 491명의 이탈리아인이 사망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기원한 전통적 범죄조직 마피아는 지역 정계와 재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강력했다. 조직 내 폭력 사건도 자주 있었고, 마피아에 대항한 판사나 정치인이 잔혹하게 암살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부패 추방운동, 마니 풀리테]
1990년대에는 공직사회의 부패를 청산하기 위해 '마니 풀리테Mani Pulite' 운동이 일어났다. 마니 풀리테란 이탈리아어로 '깨끗한 손'이라는 뜻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1960~1970년대의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정치가 사라지고, 보다 주류에 속하는 정부가 등장했다. 1996년의 선거는 기존의 야당과 재건공산당 등 신규 정당들이 한편이 된 좌파 연합과 그에 대응하는 우파 연합이 치열하게 대립한 구도를 보였다. 우파 연합은 이탈리아 북부의 분리를 주장하는 북부동맹과 이탈리아의 언론 거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 중의 한 명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전진 이탈리아당, 네오파시스트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50년 동안 이탈리아의 중앙정보에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두 극단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조직적인 정당이었던 좌파민주당은 기독교민주당 다음가는 원내 2당 위치를 고수했지만, 좌파의 집권을 두려워한 기성 정당들의 견제로 한 번도 연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과거의 이미지를 바꾼 지난날의 극우, 극좌파들은 오늘날 최선을 다해 자신을 '주류'로 포장하고 있다. 1996년 이후 나라를 이끄는 좌익중도 연정의 주요 정당인 좌파민주당은 긴급 재정개혁을 실시해 1999년 1월, 이탈리아가 유럽통화동맹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